[언론보도] "10초 안에 골 때린다" 이동국·황의조도 찾아간 주식 고수 정체

[스포츠 오디세이] 축구에 미친 돈키호테 부녀

손이경 (주)갤로핑 대표(오른쪽)가 부친인 손외태 고문과 함께 촬영에 임했다. 지름 1m 짜리 짐볼은 실제 훈련에서도 쓰인다. 최영재 기자


외동딸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온 아버지는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였다. 그가 찍어준 종목은 시간이 문제였을 뿐 대부분 크게 올랐고 투자자에게 돈을 벌어다 주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언제부터인가 축구에 빠졌다. “메시나 호날두 같은 세계 최고 선수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거든. 특히 골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남달라. 그 비밀을 알아내고 싶어”


아버지는 세계 최고 선수들의 경기 장면을 수백 번 돌려보며 분석하고 또 분석했다. 초등학교부터 프로 팀 경기까지 훑으며 메모하고 데이터를 축적했다. 그리고 주식시장 이론을 접목했다. “투자자가 불안감을 느껴 투매(投賣)를 할 때 주식을 사면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 축구도 골키퍼와 수비수가 불안감을 크게 느끼는 상황을 만들면 골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이론을 정립하고 훈련법까지 개발한 아버지 손외태(61)씨는 아예 여의도 증권가를 떠나 ‘손박사 사커 아카데미’를 차렸다. 엘리트 선수들을 지도하는 ‘골 결정력 높이기’ 1타강사로 변신한 것이다.



외동딸 손이경(32)씨는 가수 지망생이었다. 배호가요제 입상 경력도 있다. 자신의 꿈을 위해 대학 진학도 포기했다. 아버지가 벌인 어처구니없는 일을 지켜보던 딸은 “알바비 주겠다”는 제안에 아버지 일을 돕기 시작했다.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선수들의 훈련도 도왔다. 친근한 누나처럼 선수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학부모와도 스스럼없이 어울렸다.


일각선 “축구 해봤냐” 비아냥 들어


10년이 흘렀다. 그 새 18명의 전국대회 득점왕이 탄생했다. 프로 팀들도 손박사의 특강을 들었다. 이동국·황의조 같은 특급 스트라이커의 슬럼프 탈출에도 손박사가 기여했다. 하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논리는 강했지만 감성이 부족했다. 내용은 탁월한데 포장이 촌스러웠다. “축구를 해본 적도 없는 돈키호테 부녀가 뭘 하자는 거냐”는 비아냥과 견제도 여전했다.


딸은 결국 쿠데타를 감행했다. 지난해 8월, 아버지를 고문으로 밀어내고(?) 자신이 대표를 맡았다. ‘손박사 사커 아카데미’라는 이름도 (주)갤로핑으로 바꿨다. 아버지의 축구 이론인 ‘갤로핑(질주) 사커’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올해 4월 고려대기술지주 등으로부터 10억원대 투자를 받았다. 5월에 과기부 데이터바우처 사업에 선정된 데 이어 6월 13일 중소벤처기업부 팁스(TIPS·글로벌 진출을 지향하는 창업기업 지원) 프로그램에 뽑혔다. 서울 효창운동장 옆 낡고 좁은 사무실에서 ‘벤처의 메카’ 경기도 판교로 진출했다. 내년 50억, 내후년 200억 투자 유치 목표를 세웠다. 판교 제2 테크노밸리 창업존에서 손 대표를 만났다.


Q. 사무실이 넒고 쾌적하네요. 현재 직원은 몇 분인가요.

A. “작년까지 아빠와 저, 단 둘이었는데 지금은 7명입니다. 교육팀·기술개발팀·운영팀이 있는데요. 프로그램 개발자와 훈련을 지도하는 코치 등 3명 정도 더 뽑아야 합니다.”

Q. 훈련 프로그램이 독특한데요.

A. “초중고 엘리트 선수 100여 명이 훈련하고 있습니다. 10초 안에 골을 만든다는 뜻의 MG10S(Make Goal in 10 Seconds) 매뉴얼을 기반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저희 고문님이 20여년간 축적한 데이터와 이론을 녹여냈죠. 지름 1m 대형 공, 테니스볼, 공 2~3개로 드리블 훈련을 하는 건 고도의 집중력을 갖고 온 몸의 근육을 쓰기 위해서입니다. 또 커다란 ‘8’자 모양 궤도로 드리블을 하는 건 오른발과 왼발, 원심력과 구심력을 모두 활용하도록 프로그래밍 한 것이죠. K리그 유소년 팀에서 드리블 성공률 상위권 선수들이 저희 아이들입니다. 지난달 금강대기 전국 고교대회에서 중경고가 우승했는데, 결승전에서 두 골을 모두 저희 선수가 넣었습니다.”

Q. 어떻게 투자를 받을 수 있었나요.

A. “처음엔 선수들 훈련하는 영상을 찍고 편집해서 보여줬어요. 그러다가 훈련 매뉴얼 기준으로 평가 항목을 엑셀 표로 만들었습니다. ‘드리블 때 무릎을 안으로 모으고, 뒷꿈치를 떼는 자세’처럼 디테일한 항목으로 점수를 줬더니 다음 훈련에서 많이 좋아지더라고요. 그런데 이 모든 걸 수작업으로 하려니까 감당이 안 돼요. IT 기술이 필요하고 데이터를 축적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고려대기술지주(대표 장재수)를 무작정 찾아갔죠. 저의 똘끼와 저희 사업의 성장성을 보시고 흔쾌히 손을 내밀어 주신 겁니다.”

갤로핑 사커 아카데미 선수들은 공 여러 개를 컨트롤하며 드리블 연습을 한다. [사진 (주)갤로핑]


㈜갤로핑의 이동섭 운영본부장은 기술평가사이자 벤처 투자 심사 전문가다. 그는 “손 대표가 투자자 미팅에서 프레젠테이션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전문 아나운서나 쇼호스트 못지않아요. 자신에 찬 표정과 제스처, 핵심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모습에 투자자들이 신뢰감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선수 데이터 측정 넘어 솔루션 제시


Q. 가수의 꿈은 접었나요.

A. “어머니가 노래교실 강사였고 고모님들도 음대 교수님이셨어요. 그런 유전자를 받아서 나름 음악으로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는데 뜻대로 안 풀리더라고요. 지금은 제 목소리를 잃어버렸어요. 10년 동안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소리치고 파이팅 외쳐주고 하다 보니 허스키 보이스가 된 거죠. 가수는 못하겠지만 제 안의 엔터테이너 본능을 살려서 사업에서 멋지게 성공하고 싶습니다.”

Q.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적도 많았죠.

A. “제가 하나에 몰입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거든요. 하루 16시간씩 밤새 영상 편집하고, 자료 입력하고, 허벅지 찔러가면서 울면서 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인정해 주지 않고 비웃거나 외면하더라고요. 제가 포기하지 않았던 건 아버지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이 프로그램을 통해 달라지는 아이들을 보면서였어요.”

Q. 앞으로 계획은?

A. “스포츠와 디지털의 결합은 아직 초기 단계예요. IT 장비를 통해 뛴 거리와 속도, 심박수 등을 측정하고 선수를 관리할 수 있어요. 그 단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성적표가 나왔다면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솔루션도 제시해야 합니다. 그걸 저희가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을 직접 가르치는 B2C 형태지만 앞으로는 완성된 프로그램을 기존 팀이나 클럽 등에 파는 B2B로 갈 겁니다. 중국을 시작으로 동남아-미주-유럽으로 시장을 확대할 계획입니다.”

딸의 인터뷰를 지켜보던 손외태 고문의 입가에 ‘아빠 미소’가 걸렸다. 감회 어린 표정으로 그가 말했다. “축구에 미친 돈키호테 부녀라는 소리 들으면서 10년을 버텼더니 이런 날이 오네요. 축구 산업의 파이를 키워서 많은 사람이 고용되고, 행복하게 축구를 즐기게 하는 게 제 꿈이고 철학입니다. 손 대표가 그걸 해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원 포인트 레슨’ 황의조, A매치 1년 만에 엘살바도르전서 골 맛


축구 대표팀 스트라이커 황의조(오른쪽)는 손외태 고문과 자주 만나 조언을 듣는다. [사진 (주)갤로핑]


지난 20일 열린 한국과 엘살바도르의 A매치. 후반 시작과 함께 투입된 황의조(31·FC 서울)는 4분 만에 골을 터뜨렸다. 황희찬의 패스를 받은 뒤 몸을 한 바퀴 돌리면서 수비를 따돌렸다. 이어진 오른발 땅볼 슛. 공은 골대와 골키퍼 사이 좁은 공간을 뚫고 네트를 갈랐다. 지난해 6월 14일 이집트와 평가전 이후 1년 만에 맛본 A매치 골이었다.


황의조는 손외태 고문으로부터 가끔 ‘원 포인트 레슨’을 받는다. 엘살바도르전 이틀 전에도 6분 정도 통화했다. 손 고문은 “슈팅은 가능하면 깔아서 차는 게 좋다. 골키퍼가 몸을 한번 더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골 확률이 높아진다”고 조언했다.


황의조는 경기 종료 직전 절호의 골 찬스를 놓친 뒤 크게 아쉬워했다. 골키퍼와 1대1로 맞선 상태에서 때린 슈팅이 골키퍼 손에 걸렸다. 깔아서 찼더라면 결승골이자 멀티골을 터뜨릴 수 있었다.


황의조는 올해 초 FC 서울에 임대로 들어온 뒤 한동안 득점포가 침묵했다. 손 고문은 “황의조의 엄청난 활동량과 헌신 덕분에 FC 서울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제는 본인이 골 욕심을 내야 할 때”라고 했다. 황의조는 최근 K리그 2경기 연속골을 넣었다.


손 고문이 황의조를 돕는다면 손이경 대표는 황의조의 부친인 황동주 씨가 돕고 있다. 그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삼성전자에서 13년간 일한 엔지니어다. 지금은 공장자동화 시스템 업체의 임원과 충북 청주의 자회사 공장장을 겸하고 있다. 손 대표는 일이 풀리지 않을 때 늘 그를 찾았다. “황 소장님한테 ‘어떻게 하면 좋아요’라면서 울면서 전화한 적이 많아요. 그 때마다 소장님이 차근차근 해법을 알려 주시더라고요. 황의조 선수를 키워낸 경험을 바탕으로 학부모와 선수 심정을 정확하게 짚어 주셔서 큰 도움이 됐죠”라고 손 대표는 감사를 표했다.


정영재 문화스포츠에디터 jerry@joongang.co.kr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72204